제목 그림으로 기록한 이력서『숙천제아도』발간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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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림으로 기록한 이력서『숙천제아도』

허경진 | 연세대 교수





한필교가 평생에 걸쳐 편찬한 『숙천제아도』는 처음 벼슬하던 때부터 자기가 근무하던 관아를 그림으로 그려 둔 화첩이다.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기 위해서, 옛날 모습을 생각케 해주는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관아의 옛 모습을 상고할 때 자료로 삼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 화첩은 한필교가 몸으로 기록한 이력서이자 조선시대 관아연구의 보고다.


한 사람이 살아 온 생애를 가장 간단하게 기록한 글이 바로 이력서이다. 별로 활동하지 않은 사람은 종이 한 장도 채우기 힘들 테고, 많이 활동한 사람은 몇 장이 필요하겠지만,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학력과 직장, 상벌을 기록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한필교韓弼敎[1807~1878]가 평생에 걸쳐 편찬한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는 아주 색다른 이력서다. ‘숙천제아도’는 “평생 거쳐 온 여러 관아의 그림들”이라는 뜻인데, 표지에는 제목 아래 정관헌장靜觀軒藏이라고 소장처가 밝혀져 있다. ‘정관헌’은 1840년에 서문을 쓴 곳이기도 한데, 한필교의 서재 이름이다.







젊은 시절부터 근무한 관아 그리며 은퇴 준비해
한필교는 1833년에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 1837년에 목릉참봉穆陵參奉[종9품]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평생 벼슬생활을 했는데, 한필교는 처음 벼슬을 하던 때부터 자기가 근무하던 관아를 그림으로 그려 뒀다.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기 위해서, 실제 모습을 생각케 해 주는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부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관아의 옛 모습을 상고할 때 자료로 삼게 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한필교는 그림의 효용성을 알고 있어서 이런 화첩을 기획했지만,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관아를 옮길 때마다 화공에게 그리게 했으니, 한 사람의 솜씨는 아니다.
그는 1873년 첫 벼슬인 목릉참봉에 부임하면서 관아도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 오른쪽 옆에는 관아의 이름과 위치를 쓰고, 자신이 그곳에 제수된 날짜를 썼다. 중앙관서의 경우에는 그곳에서 자기가 맡은 업무도 작은 글자로 기록했다. 지방관아의 경우에는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거리를 밝혔으며, 자신이 그곳에 부임하기 위해서 떠난 날짜와 실제로 부임한 날짜도 밝혔다. 서울에서 그곳까지의 거리가 여행시간으로도 밝혀진 것이다. 이후 제용감·호조에 부임할 때마다 관아도를 그렸는데, 종묘서에 있던 1840년 6월에『숙천제아도』의 서문을 지었다. 이때부터 부임하는 곳마다 관아도를 그리기로 기획하고, 화첩의 서문을 지은 것이다.
호조에는 33세에 좌랑으로 부임하고, 37년 뒤인 70세에는 참의로 승진하여 다시 부임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지난번 그림의 부임기록 다음에 한 줄을 덧붙여 기록했다. 그 관청 다음에 제수받은 벼슬이 있어도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으면, 그런 것까지 덧붙여 기록했다. 31세에 목릉참봉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72세에 공조참판으로 부임할 때까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42년 동안 새로운 벼슬에 부임할 때마다 그 관아의 그림을 그려서 앞의 화첩에 덧붙였다.
그는 뒷날 15매의 관아도를 절첩장折帖裝으로 제본했다. 관아 하나를 두 면에 그렸는데, 마지막 그림인 <도총부> 그림 뒤에는 몇 장의 여백이 남아 있다. 한필교 자신으로서는 더 많은 관아도를 남기려 했을테니, 끝장에 발문도 붙이지 못하고 편찬을 마친 『숙천제아도』는 그에게 미완성의 화첩이기도 하다.



호조(戶曹)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기해년[1839] 6월 30일에 좌랑(佐郞)에 제수됐다. 세폐료녹색(歲幣料祿色)을 담당하고, 사축서(司畜署)도 겸했다.
병자년[1876] 3월 초2일에 참의(參議)에 제수됐다.

호조는 조선시대 중앙 관서인 6조 가운데 하나였는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식화食貨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전국의 재정을 담당했으므로 품관 외에도 계사計士 60명, 서리 60명, 사령 40명이 근무하는 큰 관청이다. 정2품 판서가 담당하는 곳이어서 당상대청 앞에는 연못과 정자도 있었는데, 33세에 좌랑[정6품]으로 부임해서 낭청대청郎廳大廳에 근무했던 그는 70세에 참의[정3품]로 부임해서 당상대청으로 옮겨 근무했다. 젊은 시절에 근무했던 호조에 37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해서 돌아온 그는 감회가 남다르게 깊었을 것이다.



영유현(永柔縣)
“평안도. 15방(坊)이다.
서울에서 630리, 순영(巡營)에서 80리, 병영(兵營)에서 90리 떨어져 있다.
[영유현] 동쪽에서 서쪽까지 50리, 남쪽에서 북쪽까지 20리다. 동쪽으로 순안(順安) 경계 냉정참(冷井站)까지 10리, 서쪽으로 큰 바다까지 40리다. 남쪽으로 순안까지 30리, 북쪽으로 숙천까지 30리다.
경자년[1840] 7월 11일에 현령[종5품]을 제수받고 [교지가 아닌] 말로 연락 받았다. 20일에 조정을 떠나, 8월 25일에 부임했다.”

첫 번째 지방관으로 영유현에 부임해 관아도를 그렸는데, 동헌과 내아 중심의 관아가 북쪽에 있고, 마을이 아래쪽에 있어 일반적인 고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동헌 청민당 한쪽의 금학루琴鶴樓 1칸까지 정확하게 그리고, 객사인 청계관 뜰의 이화정 앞의 배나무도 흰 꽃이 가득 덮인 모습으로 그려,『영유현읍지』에서 밝힌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실감케 해준다. 고을이 자리잡으려면 주민들의 식수인 우물이 중요했는데, 대부정大夫井·괴천槐泉·용정龍井 등의 큰 우물들을 분명히 그렸다. 나무도 동헌이나 향교 뒷산에는 소나무를 그리고 괴천 옆에는 느티나무를 그렸으며, 이화정에는 배나무를 그리고, 동헌 둘레에는 울긋불긋한 꽃나무를 그렸다. 지금은 거의 모든 지방에서 없어진 사단社壇과 여단癘壇도 그렸는데, 사방에 홍살문을 그려 그 모습을 보여 준다. 사방의 산에 이름이 밝혀져 있고 순안으로 가는 큰길까지 그려져 있어, 관아도가 그림지도의 효용성까지 지녔음을 알게 해준다.



종친부(宗親府)
북부 관광방(觀光坊) 벽동(碧洞)에 있다.
을축년[1865] 8월 초7일에 전부(典簿)에 제수됐다.
병인년[1866] 11월 24일에 전첨(典籤)으로 승진했다.

종친부는 종실제군宗室諸君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업무가 간단해서 관원도 별로 없고, 건물도 단순하다. 종친부 건물은 현재 종로구 화동 1번지에 현재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당中堂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사翼舍만 남아 있는데, 이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령방이나 군사방이 바깥채에 있고, 관대청이나 규장각은 안채에 있었다. 『서울건축사』에서는 “중당의 좌측에도 건물이 하나 더 있어서 좌우 균형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고, 동시에 이 현존하는 두 개의 건물이 종친부 전체의 배치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는데,『숙천제아도』가 발견되면서 이런 의문들이 풀리게 됐다. 중당 좌우로 대칭을 이룬 구조도 아니고, 전체의 배치도 확인됐다.『선원록璿源錄』을 관리하는 선원보각은 따로 담장이 둘려 있었다. 그는 종친부에 전부[정5품]로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전첨[정4품]으로 승진해 계속 근무했다.
한필교는 그림의 효용성을 알고 있어서 “[그림을 통해] 천년 전의 모습을 알 수 있고, 만리 먼 곳의 모습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평생 돌아다녔던 관아들을 늘그막에 회상하려는 생각에서 이 그림들을 그리게 한 것인데, 이 화첩은 후세인들에게 관아의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관아 복원과 연구에 긴요한 자료
현재 중앙관서 가운데 남아 있는 관아건물은 종친부와 삼군부 밖에 없는데, 두 관아 모두 옮긴 장소에 일부 건물만 남아 있다. 지방 관아도 동헌이나 객사 일부만 몇 군데 남아 있고, 관아 전체가 남아 있는 읍성은 하나도 없다. 이같이 관아 건물에 대한 자료가 드문 상황에서,『숙천제아도』는 조선 시대 관아의 모습을 소중하게 전하고 있다. 옛 관아를 복원하거나 연구할 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다.
한필교가 평생에 걸쳐 편찬한『숙천제아도』는 파란만장한 조선 시대 관원의 생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임, 승진, 파직, 유배와 좌천으로 얼룩진 그의 벼슬길을 보면, 그가 젊은 시절에 기획한 이 화첩은 몸으로 기록한 이력서이다. 늘그막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노닐면서 이 화첩을 보며 옛 기억을 더듬겠다고 했지만, 7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벼슬에 몸담았던 그는 이 화첩을 펼쳐 보고 회한에 잠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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