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살았던 삶의 한 조각을 풍수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여주는 책
조선시대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사회만들기가 지상과제였다. 그 과제를 이루는데 저해되는 요소들은 좌도로 지명되었는데 풍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풍수는 그 본질보다는 기능 면에서 절충하여 권도라는 이름으로 용인받았다. 권도라는 절충선은 어디까지나 국가 차원에서이고 조선시대를 살던 개인에게 있어서 풍수는 믿어지는 것이거나 믿고 싶은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믿음의 차원과 연결된 풍수는 관련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윤리적인 반성이 요구되지 않았다. 풍수를 통해 얻고자 했던 신앙의 욕망이 이기적으로 발현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낳았고 법제화를 통해 억누르려 했지만, 결국 규제는 성공하지 못했다. 거국적인 규제가 무색하게 산송이 조선 후기사회를 흔들었고 그 맥락에는 재산권과 분산 확보라는 세속적인 저의가 숨어있었음에도 산송의 근본적인 원인은 풍수 때문이라며 풍수는 시대 악이라고 지탄받았다. 그러나 관찬자료들이 산송의 원인이 풍수 때문이라고 꼭집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막상 산송고문서를 살펴보았더니 노골적으로 풍수를 겨냥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풍수용어를 자연스럽게 상용하고 있었다. 산송을 일으키는 원고나 피고 모두 국가 소유였던 임야를 사유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오랫동안 묘지로 사용하고 있었다거나, 가문의 정성이 들어간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풍수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소장을 제출한다는 것은 피차 송사를 하는 입장에서 노골적일 수 없었다. 법리를 판단하여 처결을 명해야 할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재산권, 분산권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투장․늑장․압장․암장․금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점탈이 확인되면 그로부터 원고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송관련법규는 풍수가 산송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임을 간파하고 풍수개념을 보호의 대상으로 정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들이 숙종 이후 일어난 일이다. 산송은 가문대 가문 만의 일이 아니라, 가문 내 자손 간의 문제이기도 했고, 개인과 마을, 사찰과 마을, 사원과 개인 간에 발발했다. 산송을 통해 가문이 결속하기도 했고 해체되기도 했으며 산송의 발발에 비해 그 처결이 명쾌하지 않아 공권력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산송의 재판증거자료인 산도가 양산되었고 그것은 조선 사회를 지리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방자료의 역할과 현실을 사는 조선 민들의 입체적 장소를 보여주는 위성사진이 되었다. 자기가 사는 집, 가문이 거주하는 마을, 조상이 잠든 묘역이 이상적인 장소임을 확인하고 바라던 조선시대 민들은 명당도를 그리고 목판으로 만들어 찍어내 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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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조선시대 풍수와 산송자료
제2장 조선시대 국가 차원의 풍수 1. 유교와 풍수의 종교적 정위 2. 풍수에 대한 양가적 태도:“불가신, 불가폐” 3. 풍수학의 국가 기구화 4. “위국용”의 풍수
제3장 조선시대 풍수운용의 실제 1. 법전자료를 통해 본 묘지풍수신앙과 산송 2. 묘지 풍수신앙과 산송
제4장 산송의 컨텍스트 1. 폐해현안으로서의 산송:국가와 민의 다른 삶의 자리 2.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인식:마을 풍수경관의 보호 3. 분산의 건립과 가문 이데올로기:신분질서의 동요 4. 산림 이용권과 조선 후기 재산권 형성 5. 풍수개념의 법적 보호와 길지 욕망:지혹풍수
제5장 산도의 유형별 분석 1. 산송증거자료로서의 산도의 의미 2. 명당도로서의 산도 양산과정과 문학적 맥락
제6장 글을 맺으며:산송자료와 조선시대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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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李花 1972년 전남 화순 능주에서 태어나 한문을 자연스럽게 대하며 자라다. 2005년 고 윤이흠 교수의 제자로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마치다. 2013년 캐나다 밴쿠버의 UBC, TWU대학의 방문교수를 지내다. 현재 남편과 두 자녀가 있으며 밴쿠버에 머물면서 풍수와 한의학을 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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