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해녀의 특이성과 연구방법 / 第二章 해녀기술 / 第三章 해녀복과 도구 / 第四章 해녀와 관련된 민속 / 第五章 해녀바다 / 第六章 바깥물질 / 第七章 해녀사회의 공동체의식 / 第八章 해녀의 권익과 수탈 / 第九章 해녀의 지역적 고찰 / 第十章 해녀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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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녀의 특성과 연구방법 2. 해녀기술 3. 해녀복과 도구 4. 해녀와 관련된 민속 5. 해녀바다 6. 바깥물질 7. 해녀사회의 공동체의식 8. 해녀의 권익과 수탈 9. 해녀의 지역적 고찰 10. 해녀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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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접근의 시작, 앞으로 10년 과제 제시 [제주잠녀] 4부 ‘잠녀, 지키다’<174>「한국의 해녀」 제민일보 2011년 03월 16일(수) 09:52:36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고 김영돈 제주대 교수 1999년 민속원 통해 제주 해녀 다룬 첫 개설서 「한국의 해녀」발간 1960년대 수산노동자에서 70년대 자유직업인, 80년대 사회문제적 접근 시작 등 계속적 연구 필요
제주에는 제주 잠녀가 있다.
산업 역군에서 제주 문화·관광 아이템을 넘어 무형문화유산 논의까지 제주 잠녀의 존재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런 존재감에 비해 제주 잠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히 제한적이다. 늘 가까이서 제주 문화를 상징하던 제주잠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술서는 1999년 민속원을 통해 발간된 고 김영돈 제주대 교수의 「한국의 해녀」가 처음이다.
그 전에도 분명 제주에는 잠녀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한국의 해녀」가 발간된 이후 일부 학문을 중심으로 제주 잠녀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작업은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 땀 흘리는 제주인 잠녀
경향일보는 1962년 10월 12일자 4면에 제주의 산업을 다루며 제주 해녀를 언급한다. 수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3000~4000여명을 헤아리는 해녀가 원시적인 방법으로 캐내는 소라(고동)·전복 등이 약 878t(가격 1100만원), 미역·천초·톳 등이 1만 3000여t에 약 3400여만원이라고 서술했다.
동아일보 1963년 8월 19일자 7면에는 원시생업으로의 해녀들의 현실이 실렸다.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생활근거가 바다 밑창이었기에 해녀가 되어버린 것 뿐이었다. 포구 언저리에 끼는 해초와 해삼 등 속 따기로 생애의 반을 늙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은 그래서 해륙양서생활을 숙원처럼 여기고 있다. 열너덧살 때부터 시작해서 환갑이 턱에 닿아야만 면역이 되는 이 벌이도 여름철이면 제주해녀의 태반이 반도(半島) 쪽으로 출가(出家)해야할 만큼 본 고장에선 지독한 경쟁업이다. 4월초부터 타향 파도에 시달리고 나면 귀향길이 바쁜 10월경에는 2만원 정도의 벌이가 된다는 것이 작년까지의 관례…".
이 기사에서는 특히 "잦은 강우와 이상기후로 (물건이 줄어들어) 귀향노자가 빠듯하다"는 언급을 해 눈길을 끈다.
1965년 8월에는 최고령 해녀 문 할망 되롱박 인생 90년Ɨ일자 7면)을 소개한다. "올해만 세 번 물질을 해 돈 1만원을 벌었다"는 할머니의 기사 속에는 미역 조문 철 뒤롱박 등 할머니가 말하는 그대로를 옮기려는 의지가 가상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주해녀를 들여다본다.
동아일보는 1970년 땀흘리는 한국인기획을 통해 30여 차례에 걸쳐 해녀와 해녀사회 전반에 대해 취재했다. 마을 구성과 잠수가(해녀노젓는 노래 등 노동요) 외에도 미국에서 관심을 갖고 접근했다는 잠수생리학까지 살폈다. 하지만 이내 언론이 주목한 부분은 잠녀 수의 감소다.
1974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8면에는 해녀 줄어드는 삼다도란 기사가 실렸다. 농지 개간과 밀감 재배가 늘어나면서 해녀가 줄었다며 산북에 비해 감귤농사가 활발했던 산남 잠녀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을 그 이유로 꼽았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1967년 2만4268명이던 잠녀의 수는 1970년 2만3930명에서 1973년 1만4657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수는 줄었어도 물건이 좋아 수입은 오히려 나아졌다고 기사는 전한다.
"해녀 수입은 하루 5백원에서 최고 5천원까지 그날의 채취량에 따라 대중이 없는데 하루 평균 2천원은 된다"
# 잠수병 등 사회적 관점으로 접근
그렇게 10년의 시간동안 제주 잠녀에 대한 관심은 수산물 생산량에서 관광 자원으로 옮겨간 듯 보인다. 기사 내용에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사회문제적 접근이 뚜렷해진다.
경향일보는 1985년 9월 4일자 11면에 해녀 잠수병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수중서 산소 아끼는 특수 체질" "부력 줄이려고 폐활량 덜어"등의 기사가 쓰여졌던 것에 반해 이번 기사에서는 1984년말 현재 6648명의 잠녀 중 59%가 각종 해녀병을 호소한다고 적고 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잠수직업병(일명 해녀병)" "장비 좋아지면서 더 깊이 자맥질하며 환자 늘어"란 부제목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 고무 잠수옷이 보급됐고 이후 물질 시간이 늘어난 것이 해녀병의 원인이 됐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1984년 2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법원 판결로 본 자유업의 가동연령기사는 더 흥미롭다.
"안내양 27세·다방마담 40세로 낮은 편, 술집 마담과 상점의 여성종업원·해녀는 50세, 일용 노무자·광부·전기공·운전사·사진사 55세…"
이때만 해도 잠녀의 고령화에 대한 언급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 지난 2008년 8월 작업 중 모터보트의 급물살 충격으로 실신한 이후 물질을 하지 못하고 있는 50대 잠녀가 모터보트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정년 만 70세를 주장, 법원의 인정여부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던 것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1999년 첫 개설서 「한국의 해녀」
이렇게 세월은 흘렀지만 잠녀에 대한 관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고령화나 노령의 잠녀가 물질을 하다 사망한 소식이라든지 지역 개발에 따른 갈등, 문화적 가치 인정 여부 등 보태진 부분이 조금 늘어난 것뿐이다.
사회적 관심을 넘어 학술적 관심을 받은 지 이제 10여년이 조금 넘은 상황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요 연구가 전공이었으나 해녀 노래의 사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해녀와 해녀 사회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야겠다는 학자적 욕심을 풀어낸 고 김영돈 교수의 작업의 의미는 크다.
「한국의 해녀」 서두에서 김 교수는 "해녀 연구는 대체로 문화인류학적·민속학적 관점, 경제적 관점, 생리학적·의학적 관점, 해양과학적 관점, 구전문학적 내지 민족음악적 관점, 법사회학적 관점, 어학적 관점, 여성학적 관점 등 다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제했다.
책은 신문 연재와 제주의 해녀조사보고서를 근간으로 정리됐다. 사진작가인 서재철·강만보씨의 역할도 컸다.
△해녀의 특이성과 연구방법 △해녀 기술 △해녀복과 도구 △해녀와 관련된 민속 △해녀 바다 △바깥물질 △해녀사회와 공동체 의식 △해녀의 권익과 수탈 △해녀의 지역적 고찰 △해녀의 항일투쟁 등 10개 항목으로 해녀와 해녀 사회를 살폈다.
내용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조금 모자라다 느껴지는 부분이 사회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해녀의 학문적 접근에 있어 첫 개설서(槪說書)인 「한국의 해녀」가 여전히 잠녀와 제주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묵직한 존재인 이유기도 하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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