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대한예전』 보도자료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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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대한제국 국가전례서, 『대한예전』


책명 : 國譯 大韓禮典
저역자 : 대한제국 사례소 지음, 임민혁․성영애․박지윤 옮김
출판사 : 민속원
출판일 : 2018. 8. 31.

작년이 대한제국 탄생 120주년이었으니, 올해는 121주년이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날짜가 10월 12일이며, 장소는 원구단이다. 원구단에서 천지에 황제 즉위 사실을 고하고 나서 제후의 복식을 황제의 복식으로 갈아입고 즉위하여 대한제국 황제국의 탄생을 세계만방에 고하였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의절이 『대한예전』에 수록되었다.
『대한예전』은 대한제국의 국가의례를 규정한 법전이다. 국가에서 거행하는 모든 의례의 절차와 규범을 정한 법전이라는 말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의 오백 년 정통을 계승하였다. 국가의례도 조선의 국가전례를 기본으로 채용하였다. 여기에다 『명회전』 등을 주로 참조하고 대한제국의 현실을 반영한 황제국 의례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독립과 자주를 외치면서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동아시아의 전통에 따라 우선 황제국으로서의 국가의례를 제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담기구로서 설치한 것이 사례소이다. 여기에는 당대의 최고 의례전문가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사례소의 존속기간은 1897년 6월부터 1898년 10월까지 약 1년 4개월에 불과하였다. 『대한예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일찌감치 문을 닫아걸고 말았다. 명분은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 사업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였지만, 결국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황실의 입장에서는 전통방식에 의한 국가의 정통 계승의 공인이 눈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요 현안임에 틀림없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종통 의식의 뿌리가 매우 깊었던 그들은 마지못해 이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하는 현실의 요구 앞에 심대한 좌절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황제의 명에도 불구하고 헌걸차게 포기를 거부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직원으로 참여했던 장지연 등이 그들이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을사늑약의 굴욕에 목을 놓아 울음 운 바로 그 인물이다. 사례소가 폐지된 지 두어 달만인 그해 말경에 이 책을 10권으로 완성하여 고종에게 바쳤다. 한스런 역사에 일말의 자긍을 토해낸 위대한 전통의 부활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장서각 소장본 『대한예전』은 유일본이다. 이 세상에 이것 한 질뿐이다. 미완성본으로 대한제국의 국가전례서라는 위풍당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대한제국의 신성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쓴 당시인들의 울분에 찬 전통의식과 자존 어린 열성의 산물이었다. 『대한예전』은 대내외에 반포하지 못한 비공인의 전례서이기는 하나, 적어도 황제의 기본권과 정통성의 토대를 전통의 격식에 맞게 일으켜 세우는 초석의 역할을 하였다. 대한제국의 정통과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 한, 이 예서는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대한제국의 탄생
고종은 대한제국의 탄생을 하늘신과 땅귀신에게 고하였다.

“금년 9월 17일에 백악의 남쪽에다 단을 설치하고 의절을 갖추어 밝히 상제(上帝)와 황기皇祇께 아룁니다. 천하의 이름을 정해서 대한이라 하고, 이 해를 광무원년으로 삼습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양력)에 오백여 년 동안의 사대를 떨쳐버리고 완전한 독립국임을 저 하늘과 세계 모든 지역에 선포하였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한’이며, 연호는 ‘광무’라 했다. 이때의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대한예전』의 편찬이었다.

『대한예전』의 편찬
『대한예전』은 제후국의 면모를 탈피하여 황제국으로서 국가의 자존을 세우려는 정책하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였다. 사례소라는 임시 편찬기구를 설치한 이래 1년 4개월여 만에 미완본이나마 상재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예법서는 『대한예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한예전』은 황제의 신성성과 세속의 권력을 예의 형식으로 체계화한 규범서이다. 조선을 정통으로 내세우고 『국조오례의』를 전범으로 삼았다. 대한제국은 국가의 정통성을 조선에 두었으므로 조선의 국가전례를 기본으로 채용했다. 여기에다 황제국 의례는 『대명집례』와 『명회전』을 주로 참고하였다. 중화를 계승하려는 의식의 반영이면서, 청과의 단절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서 『대한예전』에는 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대한예전』 편찬기구 사례소의 설치와 폐지
조선정부에서는 황제국 출범에 대비한 사전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앞둔 조선정부는 즉위의례의 제정과 원구단의 설립이 시급한 현안이었다. 그리하여 고종 34년(1897) 6월 3일 내부대신 남정철의 건의로 사례소가 설치되었다. 사례소는 황제 즉위의례의 제정과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구였다.
사례소가 정식으로 출범한 날은 인사가 단행된 6월 14일이었다. 이 날, 고종은 의정부참정 겸 내부대신 남정철을 사례소위원, 3품 이종원과 남정필․김인식을 부원으로 임명하고, 편집사무를 분장하였다. 사례소는 남정철의 추천으로 위원과 부원을 보좌할 직원과 과원을 충원하였다. 직원은 진사 김응수, 진사 장지연 등 9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상근직으로 날마다 출근하여야 하며, 윤번으로 입직하도록 하였다. 과원은 중추원 주사 백남규, 주사 최시명 등 4명을 뽑았다. 이들은 현직 관료로서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업무를 보는 비상근직이었다. 이틀 뒤에 남정철은 본소의 사무가 점차 늘어나 2명의 직원을 더 뽑겠다고 하여, 상근직의 수를 늘렸다.
그러나 대한제국 성립의 전후시기에 존속했던 사례소는 1898년 10월에 이르러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서 폐지되고 말았다.

“사례소에서 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여 다른 것과 다르므로 하루 이틀 사이에 일을 마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위의 말처럼 고종은 그 기구의 존속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재정이 궁색하여 시급한 경비도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기구의 개편은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사례소는 우선적인 폐지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사례소의 존속기간은 1897년 6월부터 1898년 10월까지 약 1년 4개월에 불과하였다.
사례소의 폐지 이후, 직원으로 참여한 장지연 등의 기록을 통해서 『대한예전』의 편찬작업은 계속 이어졌으며, 두어 달만인 그해 말경에 10책으로 완성하여 고종에게 바쳤다는 사실 정도만이 확인된다.

『대한예전』은 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황제 즉위의례의 준비는 고종의 황제즉위 수락 이전부터 추진되었다. 고종은 황제 즉위 요청을 수락한 뒤에, “그 의절은 순전히 고례를 쓸 필요가 없으며 우리 의례를 짐작손익하여, 그 간편함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황제의 즉위 관련 의례를 고례 곧 중국의 옛 의례를 쓰지 말고 우리 의례를 우선적으로 참작하고 손익해서 간편한 것을 취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고종의 이 한 마디는 『대한예전』 편찬작업 전반의 기본방침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 의례에 없는 황제국 고유의 의례는 중국 황실의 전장이나 역대의 전례를 따라야 하는 불가피함을 인정하였다.

『대한예전』의 내용 구성
『대한예전』은 권1부터 권10까지 총 10권이다. 내용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즉위의(卽位儀)와 서례(序例), 의주(儀註)이다. 권1은 『대한예전』의 편찬의도와 성격을 잘 나타내는 고종의 황제 즉위의와 그 부속 의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 의주로는 고종의 황제즉위를 백관들이 하례하고, 아직 국장을 치르지 않은 민비를 황후로 책봉하며,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책봉하고, 명헌태후에게 올린 존호의 보인을 바치는 의례 등이 있다. 이러한 의례들은 또 후속 예법이 있게 마련인데, 명성황후의 책보(冊寶)를 빈전(殯殿)에 바치는 의례와 책봉 후의 하례, 치사(致詞), 조알(朝謁)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서례와 의주는 오례, 곧 길례, 가례, 군례, 빈례, 흉례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대한예전』에 나타나는 황제국 의례
원구단 설치와 원구제의 시행 : 조선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가제사가 종묘와 사직 제사였으며, 황제국 의례인 원구제를 실시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이 원구제를 국가제사에서 가장 앞에 두었다. 이를 위해 원구단을 설치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원구단의 건립은 장례원경 김영수가 “삼가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남교(南郊)에서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즉위할 때에는 천하명산(天下名山)과 대천(大川), 성황(城隍), 교단(郊壇), 사토(司土)의 위패를 그 담 안에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라고 상주한 바와 같이, 황제국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천자의 예는 하늘을 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처럼, 천지에 대한 제사는 황제 고유의 권한이며 황제 제사권의 상징인 것이다.
원구단은 한양의 중앙인 회현방에 신축되었다.
팔일무 : 제사에서의 일무는 육일무에서 팔일무로 개정되었다.
십이장복 : 황제와 황태자, 황후, 황태자비의 복식이 모두 바뀌었다. 면류관은 황제의 경우 구류면에서 십이류면, 황태자는 칠류면에서 구류면으로, 황후는 구룡사봉관, 황태자비는 구휘사봉관으로 개정되었다. 예복은 황제의 경우 구장복에서 십이장복, 황태자는 칠장복에서 구장복으로, 황후는 심청색의 12등급 적문이 직조된 적의로, 황태자비는 심청색의 9등급 적문이 직조된 적의로 바뀌었다.
의장의 개편 : 노부에서는 『국조오례의서례』의 황의장과 홍의장이 생략되었는데, 그것은 이 의장이 중국 황제의 조칙을 맞이하거나 표문을 보내는 의식 등에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의장은 군왕천세기를 군왕만세기로, 홍개와 홍양산을 황개와 황양산으로 개정하였다.
호칭의 개정 : 임금의 생일 명칭이 천추절에서 성절로, 왕세자의 탄일이 천추절로 바뀌었다. ‘전하’가 모두 ‘황제’ 혹은 ‘폐하’로, ‘왕후’가 ‘황후’로, ‘왕태자’가 ‘황태자’로, ‘대비’가 ‘태후’로, ‘왕태자비’가 ‘황태자비’로 개칭되었다. 국왕의 말을 나타내는 용어인 ‘교(敎)’는 ‘제(制)’와 ‘칙(勅)’, ‘조(詔)’로 개칭되었다. 그에 따라 의례 집사관의 명칭도 전교관이 승제관으로 바뀌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명도 ‘전(箋)’에서 ‘표(表)’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하전(賀箋)’이 ‘하표(賀表)’로 바뀌고, 관련 집사관의 명칭도 선전관宣箋官과 전전관(傳箋官), 선전목관宣箋目官이 선표관(宣表官)과 전표관(傳表官), 선표목관(宣表目官)으로 개칭되었다.

서양식 의례의 수용
『대한예전』 「빈례서례(賓禮序例)」에는 사신등급, 접대원수, 연향도, 국서식 등이 수록되었다. 모두 서양식의 외교관례에 따라 바뀐 것이다. 빈례에는 각국(各國) 사신이 국서를 바칠 때의 접견의(接見儀)와 이들에게 연향을 베푸는 의절의 의주가 제정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의례는 연향의인데, 먼저 방바닥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의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서 식사하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주인이 사신을 맞이할 때에는 읍례를 행한다고 되어 있으나, 서양 사신에 대해서는 그들의 풍속에 따라 악수를 하도록 하였다.

『대한예전』의 가치
『대한예전』은 황제의 일상적이면서 규범화된 모든 의례를 제정하여, 대한제국이 전 세계에 보편타당한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과시하고자 했던 전범(典範)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국가 위신의 위대한 승화 작업이 미완된 채 실패로 끝났으나, 편찬 과정과 미완의 전례서를 통해 대한제국 황제는 조선의 왕통을 이어받은 황통 전유권자임을 대내외에 포고하고자 하였다. 또한 청나라 등 모든 외국과 국가적․외교적 평등권을 확보하여 자주적․독립적으로 향유하는 권리를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응집시켜 황권의 위상 정립이라는 결실을 맺고자 했던 국가적 신념의 결정체가 『대한예전』이었다.

종묘대제 등 현재 전통의례 재현의 근거
『대한예전』은 당시에 이미 시행하고 있던 의례를 수용하여 정리한 전례서이다. 새로운 의주와 서례는 황제국을 상징하는 최소한으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에 『대한예전』이 미완성본이라 하여 활용의 가치를 배제한 것은 아니며, 그에 근거한 의례가 계속 시행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석전제 등 각종 전통의례의 재현이 황제국 의례에 준거하여 시행되고 있으며, 그 근거가 『대한예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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